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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년생 김지영> 현실이 삼킨 존재를 비추는 허구의 빛 ~처럼
    카테고리 없음 2020. 2. 2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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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생 김지영>은 '영화'비평을 못하게 찢긴 영화이다. 영화의 운명은 영화 스스로 자결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재창조되기 일쑤였다 영화의 텍스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이 대체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키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자신감은 느껴졌다. 그러자 새 영화를 둘러싼 이해되지 않는 반응은 뜸한 수용자들이 영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을 씁쓸하게 일깨워줍니다. 영화에 관한 의견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간을 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반대 목소리까지 본인의 논리로 환원시키거나 자신의 영화를 왜곡한다면 그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된다.영화에 대한 오해와 논란은 대부분 원작 소설<82년생 김지영>에서 연속된 것이어서 논란에 대해서 예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작 소설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서사를 둘러싼 대조적인 비판의 동시성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신' 어떻게 그 모든 1이 있는 인물에게 1어 날수 있나'는 것이었다 이는<82년생 김지영>의 스토리가 허구임을 전면 부인함에 주목된다. 소설<82년생 김지영>이 취재와 통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스스로 투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논픽션에 가까운 소설이며, 르포가 없다. 이런 비판은 서사 자체에 적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비를 통한 여성의 공감대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가깝다. 또 다른 비판은 영화와 소설에 존재하는 인물 김지영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 본인이 겪은 어려움이 가장 큰 것처럼 엄살을 떠는 것이었다. 영화나 소설 속 인물이 그렇게 발언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를 비판할 예정으로 간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김지영의 서한을 빌려 자신의 경험이 가장 힘들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런 발언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영화를 본개인의 평가, 자신의 판단 1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평가,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비판하면 되는 1이었다 그것을 소설과 영화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 자신이 소설과 영화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에 이 틀을 씌워것은 우습다 예상하기조차 힘든 1이었다 그것과는 별도로 우울함과 억울함은 경중의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감정에 먼지도 남지 않은 1에서 다른 누군가는 죽는다. 그래서 누구나 타인의 우울과 억울함을 굳이 본인의 경험 요령은 상상 속 타인의 것과 비교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다. 사르트르는<반유대 주의와 유대인>에서 만 1혼자의 유대인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반유대 주의는 유대인을 창조하고 나 자기 창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82년생 김지영>사태에 대해서도 이처럼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만 1혼자의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를 창조해서 나를 스스로 만들어낼 예정이었다. 영화에서 지영이 엄마 미숙(김미경)은 지영(정유미)에게 자기 대, 자기 대라고 답해요. 그러자 신화 반응을 보면 나대라는 예기치 않게 어떤 여성이 이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정세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한다. '자기 댐'이라는 이름의 싸움이 전천을 만든다는 신념과는 무관하게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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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성을 둘러싼 조금 오해의 통계는 통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소설<82년생 김지영>에 내린 지지와 공감은 서사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때 보편성은 어느 정도의 착각이나 각색의 기반 위에 가능해진다. 소설 자체가 '평범'하다고 이야기되는 보통 여성이 경험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소설은 각자의 경험이 떠오르는 일상의 무대를 제공합니다. 어린 시절 집, 바바리맨이 출몰한 학교,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어두컴컴한 길, 첫 직장에 출근하는 길에 긴장과 설렘, 명절 풍경, 집에 있는 시간, 커피숍, 공원 같은 무대의 예기였다. 여자들은 김지영이 경험한 개인적인 사고가 아니라 그 사고가 일어난 세팅의 보편성에 공감할 것입니다.(이 무대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소견하는 사람은 그 안에 나이를 아는 누군가를 대입해 보거나 최악의 경우 가장 혐오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자를 넣기도 할 것입니다.)<82년생 김지영>의 보편성이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 것처럼, 서사에 대한 공감도 경험만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역설적으로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에피소드를 다룬 부분에서 가장 공감이 갔다. 소설과 영화에서 공감한 장면은 각기 달랐지만 소설에서는 지영이 길거리에서 유모차를 밀거나 커피 한 잔을 든 채 산책하면서 직장인 무리로부터 심충이라는 비하 발언을 듣는 순간이 깊이 각인됐다. 누군가를 편의적으로 분류된 인물군에 맞게 해석하고 그에 대해 혐오스러운 발언을 하는 행위는 얼마나 무례한가! 그 순간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판단에서 나온 혐오인지를 체감했다. 반면 영화에서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초반 벤치에 앉았던 지연이가 슬금슬금 직장인을 피해 버림으로써 짧게 처리한 다소음, 후반부에 소설에는 없던 카페에서의 극적인 귀추와 이에 대한 대처를 삽입할 생각입니다. 나를 향해 "심충"이라고 예기하는, 어떤 남자에 대한 지영의 일갈은, 이상적이고 온건하고 찬스가 떨어지는 교본같기도 하겠지요. 이 장면은 지영이 상담 도중 털어놓는 에피소드의 재현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다. 한편 이 장면은 누가 현실에 겉으로 심충이라고 하느냐는 흔한 통념에 대한 대답처럼 보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사실 개념만큼 명징하게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온라인의 빈정거림은 오프라인에서 누군가의 행위를 제약하거나 위축시킬 수 있다는 무서운 실제였기 때문이다. 지영의 차분한 대응은 맥예기남에 대한 지영의 무기가 단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예기일 수밖에 없는 소음을 보여준다. 이는 동료의 악플 발언에 일부러 커피를 타는 것으로 대응한 남편 대현(공유)의 직접적인 행위와는 대조적이다. 이 시퀀스를 장악한 것은 당당하게 소견을 밝히는 김지영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영이를 맘충이라고 욕하던 일행이 사라지자 그 공간에 아이를 안은 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통해 누군가의 예기를 호위한 것은 예기치 못한 공감대임을 보여준다.영화에서는 지영에게 병증이 처음 발현되는 순간에 울컥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것이 끔찍한 병이라서가 아니다. 그 예상이 나온 타이밍이 군무도 적절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의 여자 형제가 저희 부모님 집에 막 도착했어요. 지영은 여전히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지연에게 음식을 내놓으라고 부탁했을 때, 갑자기 그녀는 어머니의 미숙으로 빙의된 것처럼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고 불러 말합니다. 딸이 오면 제 딸도 보내 주세요. 저도 딸이 귀해요.이는 병증이기 이전에 일종의 판타지다. "자기 딸이 사업이라는 이해가 누군가의 딸도 사업이라는 이해로 전환 없는 순간 지영이의 병증은 분리된 어머니를 통과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만 울렸던 이야기를 1곳에 정리한다. 그 판타지는 자네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귀추를 중지시키고 충격을 주는 방법으로 작용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지영의 병증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처럼 보였다. 이런 환상의 순간은 지영의 외할머니에 의해 빙의된 채 어머니의 미숙함을 달랠 때 정점을 찍는다. 따라서 지영이는 나만 피해자처럼 여긴다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병증과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단, 그것이 영화이고, 소설의 표현 방식에 관해서 예기하는 것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환상은 누군가의 병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병증을 경유한 환상지영의 병증은 극적 반전이 아니라 기존의 귀추 속에 공기처럼 스며든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영의 캐릭터가 그려진 방식 때문이었다. 지연에 관해 여성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그려낸 최근 여성 서사와 비교해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는 요지의 비판을 봤다. 캐릭터에 대한 최종 판단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은 아니다. 김지영을 맡은 배우 정유미는 내 캐릭터 연기 방법에 대해서'단순한 상태에 가장 큰 저를 빠뜨리고 연기' 했다고 전했다(<씨네 2일>일 228호, 커버 스타'<82년생 김지영>의 정유미-스토리를 만든 사람의 심정을 전하는 것입니다이는 김지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예기처럼 들린다. 배우 정유미만큼 캐릭터 김지영도, 일종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김지영이라는 존재 속에서 엄마도, 할머니도, 죽은 지인도 찾아간다.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관객도 포용하겠습니다. 플래시백에 삽입된 그녀의 과거 편린까지도 동일인물의 다른 시각이 아닌 하나의 귀추에 의한 개별 개체의 빛처럼 느껴진다. 하고 김 도연 감독은 전작<자유 연기>(20일 8)로 강 이에킥무 배우가 연기한 지연이 그러했듯이 보통 현실에 지친 캐릭터가 있었고, 그러는 것이 예상되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도록 투명한 캐릭터를 가져다 놓고 있다. 영화가 보여준 지영이라는 캐릭터는 고착된 인물의 재현을 중단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발언이었다.영화가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영화에 새기는 방법은 그가 숨쉬는 순간을 통해서다. 영화는 지금까지 극적으로 표현되어 온 '빙의'라는 현상을 잠시 휴지기와 호흡의 변이로오프닝 시퀀스에서 지영이 혼자 베란다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장면은 집안 청소를 하는 다소 뻔한 단면의 나열 뒤에 등장합니다. 지영의 휴식은 연속된 노동의 하나로 존재하는 대신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다소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베란다라는 공간은 지영이 숨쉬는 공간이자 가장 영화적인 공간이었다. 그곳은 집에 갇힌 지영이 밖을 내다보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지영이에게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이때 빛은 현실의 햇살이 아니라 세공된 미술의 흔적이 엿보이는 어딘가 인공적인 빛이었다. 피로와 우울이 깃든 지영의 얼굴을 비추는 빛은 그녀가 선 자리가 일종의 무대임을 알려준다. 무대로서의 투명한 베란다는 전체 연극 중 무대에 오르기 직전 잠시 숨을 고르고 들어가는 출입구 같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위로하고 현실의 역할 속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영화가 도식성을 무릅쓰고 빛을 마주한 지영의 얼굴을 보여주고 막을 열고 닫은 이유 또한 현실의 장소에서 무대를 발견하고, 그 무대 위의 배우에게 완전한 시간을 선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하지만 막이 내린 뒤 다른 결예기가 처음이다. 기고가의 삶을 사는 김지영은 자신의 이야기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겁니다. 이 글은 실제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예상 밖의 영화 결예기가 보여주는 것은 소설에서 나온 영화가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지연의 목 sound로 소설 문장이 발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제3자의 시선 아래에 놓인 소설 속 지영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지영이로 변신한다. 소설과 영화 속의 김지영은 분리됨과 동시에 새로운 연결성을 갖는다. 김지영의 목 sound는 객관적 서술을 고백의 서사로 치환하는 동시에, 일인칭 코벡치에이 없는 3인칭 화법을 고수할 것입니다. 김지영의 목 sound가 배우 정유미의 목 sound로 발화하는 순간 캐릭터 간 접합과 분리에 더해 배우와 캐릭터의 관계도 연속적으로 나뉜다. 이 때문에 지영의 자아가 가장 비대해지는 순간에 지영은 배우로부터 분리돼 관객으로 향할 겁니다. 분리됐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고 연결됐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캐릭터 창조의 세밀함은 그 나이 배우이기도 한 김도영 감독의 장점이 발휘된 결과다. 영화는 인간의 보고서에 가까운 선형 서사를 관계의 서사로 되돌렸을 뿐 아니라 영화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가 생기는 양상을 내포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가장 박해된 서사를 돕기 위한 가장 사려 깊은 연대일 것이다


    시네 2개 www.cine2개.com 문·소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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